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Daily UPDATE/D_오늘의 뒤끝

'오늘들'

AMY_SHIN 2012. 10. 12. 10:54

 

그래, 자네가 요즘 슬럼프라고?
나태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기가 어렵다고?
그런 날들이 하루이틀 계속되면서 이제는 스스로가 미워질만큼,
그런 독한 슬럼프에 빠져있다고?
왜, 나는 슬럼프 없을 것 같아? 이런 편지를 다 했네,
내 얘길 듣고 싶다고.

우선 하나 말해 두지, 나는 슬럼프란 말을 쓰지 않아,
대신 그냥 ‘게으름’이란 말을 쓰지.
슬럼프, 라고 표현하면 왠지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서…
지금부턴 그냥 게으름 또는 나태라고 할께.
나는 늘 그랬어.
한번도 관료제가 견고한 조직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지.
하다 못해 군대도 학교(육군제3사관학교)였다니까?
그렇게 거의 25년을 학생으로 살다가,
어느 날 다시 교수로 위치로 바꾼 것이 다라니까?
복 받은 삶이지만, 어려운 점도 있어.
나를 내치는 상사가 없는 대신, 스스로를 관리하지 않으면
안되는 게 내 삶이었거든.
그래서 늘 힘들었어, 자기를 꾸준이 관리해야 된다는 사실이.
평생을 두고 나는 ‘자기관리’라는 화두와 싸워왔어.

사람이 기계는 아니잖아…
감정적인 동요가 있거나, 육체적인 피로가 있거나,
아니면 그냥 어쩌다 보면 좀 게을러지고 싶고,
또 그게 오래 가는 게 인지상정이잖아…
교수라는 직업이 밖에서 점검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슬럼프,
아니 나태에 훨씬 쉽게 그리고 깊게 빠져.
내가 자주 그렇다니깐?
자네들에게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.

난 나태란 관성의 문제라고 생각해.
자전거는 올라타서 첫페달 밟을 때까지가 제일 힘들지.
컴퓨터 켜기도, 자동차 시동걸기도,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.
정지상태를 깨는 첫 힘을 쏟는 모멘텀을 줄 의지가 관성에 치여버리는 현상...
난 그것이 자네가 말하는 ‘슬럼프’의 합당한 정의라고 생각해.
근데, 문제는 말야, 나태한 자신이 싫어진다고 말은 하면서도
그 게으른 일상에 익숙해져서 그걸 즐기고 있단 말이지.
‘슬럼프’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,
실은 그걸 즐기고 있단 말이지.
실은 자네도 슬럼프를, 아니 오랜만의 연속된 나태를,
지금 즐기고 있는 거라면 이 글을 여기까지만 읽어.
딱 여기까지만 읽을 사람을 위해 덕담까지 한 마디 해줄게.
“슬럼프란 더 생산적인 내일을 위한 재충전의 기간이다.”
됐지? 잘 가.

하지만, 위에 쓴 덕담은 거짓말이야.
너무 오래 나태하면 안돼. 자아가 부패하거든,
그러면 네 아름다운 육신과 영혼이 슬퍼지거든,
그러면 너무 아깝거든.
그러니까, ‘정말’ 슬럼프, 아니 나태에서 벗어나겠다고
스스로 각오해. 그리고 이 다음을 읽어.

보통 ‘슬럼프’ 상태에서는 정신이 확 드는 외부적 자극이 자신을
다시 바로 잡아주기를 기다리게 되거든?
어떤 강력한 사건의 발생이나, 친구/선배의 따끔한 한 마디,

혹은 폭음 후 새벽 숙취 속에서 느끼는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라도…
그런 걸 느낄 때까지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자학을 유보하거든?
땍! 정신 차려 이 친구야, 그런 자극은 없어, 아니면 늘 있어.
정말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이란 말야.
그 자극을 자극으로 받아들이고,
그걸 생활의 실천으로 옮기는 스스로의 노력
이 없으면
그런 자극이 백번 있어도 아무 소용 없단 말야.
정말 나태에서 벗어날 참이면 코끝에 스치는 바람에도
삶의 의욕을 찾고,
그러지 않을 참이면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늘 같은 상태라니까?

내가 자네만할 때는 말이지, 가을이면 특히 11월이면,
감상적이 되고 우울해지고 많이 그랬거든?
"자 11월이다, 감상적일 때다" 하고 자기암시를 주기도 하고…
그래 놓고는 그 감정을 해소한다고 술도 마시고, 음악을 듣고…
그러면 더 감상적이 되고…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은근히 즐겼어.
딱지가 막 앉은 생채기를 톡톡 건드리면
따끔따끔 아프지만 재밌잖아?
내 젊은 날의 버거움이란 그런 딱지 같은 거였나봐.

나도 철이 들었나보지? 차츰 해결법을 찾았어.
감정은 육체의 버릇이라는 걸 깨닫게 된거지.
일조량의 부족, 운동량의 부족, 술/담배의 과다…
즐기지 않는 감정적인 문제에 근원이 있다면 그런 거야.
난 정말 감정에서 자유롭고 싶으면 한 4마일 정도를 달려.
오히려 술도 되도록 적게 마시지,
몸이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.
그리고 무엇보다 일을 해. 꽤 효과 있어.

더 근원적인 건 '목표'의 문제야.
나태는 목표가 흐려질 때 자주 찾아오거든.
선생님 같은 나이에 무슨 새로운 목표가 있겠니?
내 목표란 '좋은 선생' '좋은 학자' 되는 건데,
그 '좋은' 이라는게 무척 애매하거든.
목표는 원대할수록 좋지만, 너무 멀면 동인이 되기 힘들어.
그래서 나 같은 경우엔 더 작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지.
대개 일주일이나 한달짜리 목표들…

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싶어?
'정말로' 원한다면 해결은 생각보다 쉬워.
'오늘' 해결하면 돼. 늘 '오늘'이 중요해.
"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," 뭐 이런 차원이 아니야.
그냥 오늘 자전거의 첫페달을 밟고 그걸로 만족하면 돼.
그런 오늘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모이거든,
나태가 관성인 것처럼 분주함도 관성이 되거든.
사실은 선생님도 먼 나라에 혼자 떨어져서 요즘 감정적으로 무척 힘들어.
그래서 물리적인 생활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해.
육체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했잖아?
늦게 자지 않고, 일찍 일어나고, 술 마시지 않고,
햇빛 아래서 많이 움직이고 걷고 뛰고,
꼭 1시간은 색스폰 연습하고, 몇 글자라도 읽고,
3페이지 이상 글쓰고… 나는 잘 알거든,
이런 육체적인 것들이 무너지면
걷잡을 수 없이 나태 속으로 빠지게 되는걸. 여러 번 경험했거든.

힘 내.
얘기가 길어졌지?
내가 늘 그래.
대신 긴 설교를 요약해 줄게.
(선생님답지?)

일. 나태를 즐기지 마.
     은근히 즐기고 있다면 대신 힘들다고 말하지 마.
이. 몸을 움직여. 운동하고, 사람을 만나고, 할 일을 해.
     술 먹지 말고, 일찍 자.
삼. 그것이 무엇이든 오늘 해. 지금 하지 않는다면,
     그건 네가 아직도 나태를 즐기고 있다는 증거야.
     그럴거면 더 이상 칭얼대지 마.
사. (마지막이야 잘 들어) 아무리 독한 슬픔과 슬럼프 속에서라도,
     여전히 너는 너야.
     조금 구겨졌다고 만원이 천원 되겠어? 자학하지 마,
     그 어떤 경우에도, 절,대,로.

그거 알아? 모든 것은 흘러.
지나고 나면 이번 일도 무덤덤해 질거야.
하지만 말야, 그래도 이번 자네의 슬럼프는 좀 짧아지길 바래.

잘 자.
(아니, 아직 자지 마. 오늘 할 일이 있었잖아?)
새임.

 


 

-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(2005. 2.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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